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포반도 전투 (문단 편집) == 전투 ==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해 서해로 흘러들어가는 김포반도 북단 지역은 유속이 빠르고 강폭도 비교적 넓은 편이다. 북한군은 6월 26일부터 김포반도 북단의 월곶면과 하성면 지역으로 강을 건너 진출하려고 시도했으며, 국군은 문수산 등의 하안 고지에 참호를 파고 진지를 쌓아 북한군의 진출을 막으려 했다. 6월 26일 새벽 북한군의 일부 부대가 강을 건너 김포반도에 상륙했으며, 그날 오후부터 강녕포(康寧浦) 등을 통해 본격적으로 도하를 시도했다. 국군은 포격 등으로 북한군이 강을 건너오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전력의 열세 때문에 6월 27일 오전까지 북한군 제6사단의 병력 대부분이 강을 건너왔고, 국군은 통진으로 물러났다. 국군은 운유산과 천마산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김포읍으로 연결되는 도로를 차단하려 했다. 하지만 북한군의 공격에 밀려 김포읍과 양곡 방면으로 퇴각해야 했다. 이 와중에 김포지구 전투사령관으로 임명된 [[계인주]] 대령은 사령관이라는 작자가 부하들을 내팽개치고 사라져버리는 아연실색할 사태가 발생했다. 후일 이 인간은 그것도 모자라 6월 28일 야간열차 편으로 가족과 함께 대구로 도망쳤다는 게 밝혀졌다. 결국 김포지구 전투사령부 참모장이던 최복수 중령이 임시로 김포지구사를 지휘한다. 전황이 크게 불리해지자 육군본부는 1개 대대 규모의 병력을 김포로 증파했으며, 부평에 주둔하던 병력도 김포 전선으로 투입했다. 그러나 6월 28일 전차중대도 도하에 성공한 북한군은 국군의 방어선을 뚫고 김포읍과 김포비행장까지 점령했다. [[시흥지구전투사령부|시흥지구 전투사령관]] [[김홍일(군인)|김홍일]] 소장은 변변한 저항도 없이 김포비행장을 내줬다고 질책하면서 최복수 중령을 직위해제하고 대신 3사단 참모장 우병옥 중령을 사령관 대리로 임명했다. 국군은 장릉산·계양산·개화산 등에 진지를 쌓고 북한군이 부평과 영등포 방면으로 진출하지 못하도록 막으려 했다. 6월 29일에는 김홍일 장군의 명령에 따라 반격에 나서 김포비행장 탈환 작전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공격을 실시한 12연대 3대대, 22연대 3대대, 기갑연대 3대대는 전력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했으며, 자원하여 공격을 지휘한 참모장 최복수 중령과 기갑연대 3대대장 강문헌 대위, 돌격을 이끈 선임중대장 김일록 중위도 전사했다. 공격 실패와 참모장 전사를 보고받은 사령관 대리 우병옥 중령은 권총으로 자결했다. 사령관 대리와 참모장의 죽음으로 김포지구사가 통합지휘능력을 상실하자 김홍일 장군은 29일 아침 김포나루로 도하, 철수해온 18연대장 임충식 중령이 지휘권을 이어받게 한다. 김포지구사 잔여 병력은 6월 30일에도 비행장을 탈환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다시 공격에 실패하고 비행장 남단에서 한걸음 더 밀려났다. 이날 늦게 오류동·소사 방향에서 위협을 느낀 김홍일 장군은 제5사단 15연대장 최영희 대령을 김포지구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철수중인 5사단 병력을 수습하여 경인가도를 고수하도록 명령했다. 7월 1일 최영희 대령은 미 공군의 참전으로 제공권을 확보했으니 김포비행장보다는 공격의 발판을 마련하는 게 더 급하다고 판단, 박격포와 장갑차의 지원 하에 전날 피탈당한 138고지와 107고지를 공격하여 악조건에도 양 고지를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7월 2일에는 보다 북쪽의 126 고지에 대한 공격이 실시됐지만 성과는 없었으며, 김포지구사는 한강선이 무너져 경인가도를 고수할 이유가 없게 된 7월 3일 오전 10시까지 북한군을 저지하는 임무를 완수하고 영등포 방면에서 퇴로가 끊기는 것을 피하기 위해 철수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